2012. 11. 7. 06:10

김지하 박근혜 지지, 변절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부패한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오적'으로 저항시인으로 각인 되었던 김지하 시인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다는 식의 발언을 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박정희의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상징적인 인물이 그 독재자의 딸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난센스이기 때문이다.

 

온화한 박근혜가 믿음이 간다는 김지하의 코믹 쇼

 

 

 

 

 

군부독재에 맞서 시를 통해 저항을 했던 대표적인 시인인 김지하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저항시인이다. 그런 그가 칠순이 넘어 독재자의 딸을 옹호하는 일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소신이든 노망이든 여전히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딸에게 찬양을 하는 것은 그 스스로 자신이 저항하던 독재를 받아들이겠다는 논리로 읽히기도 하니 말이다.

 

김지하가 독재에 저항하더니, 독재와 사랑을 맺은 것은 아니냐는 의견들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미움은 곧 사랑을 잉태할 수도 있다고들 하듯, 그 역시 오랜 저항을 통해 스스로 독재를 사랑하는 단계까지 온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된다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것일까? 아니면 최근의 사건이나 바로 직전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코르샤코프 증후군 환자는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박 후보가 자신이 정치를 하는 이유가 아버지인 박정희를 복권시키기 위함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 이야기를 스스로도 지속적으로 주장한 일이니 말이다.

 

김지하가 박근혜의 새로운 모습을 봤다는 장면이 방송을 통해 보여준 사과 쇼라면 그는 이제 사물을 보고 그가 무엇인지 판단하는 지각 능력도 떨어진 듯 보인다. 인혁당 사건마저 민혁당이라 읽어 논란을 일으킨 사과 쇼는 곧 이어 벌어진 '말춤'으로 안드로메다 정도로 날아 가버린 그 사과가 진정성을 담은 사과라고 판단해 지지를 한다면 그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아버지(고 박정희 전 대통령)를 놓아버리고 엄마인 고 육영수 여사를 따라 너그러운 여성 정치가의 길을 가겠다는 후보에게 믿음이 간다"

 

김지하가 종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이 바로 이 대목이다. 아버지를 놓아버리고 라는 대목이 바로 박 후보의 사과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김지하 시인의 판단은 한심스럽다. 그 스스로 그렇게 느꼈다면 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믿음이 생겼다면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니 말이다.

 

"처음엔 뭔가 있는 줄 알았는데 아직 어린애다. 촛불에 관여한 2030세대가 인터넷을 통해 안철수를 괜찮은 사람이라 하고, 4060세대까지 이어지면서 박원순 시장이 나왔다. 나도 안철수가 그런 가능성을 가진 걸로 봤다. 하지만 근 열흘 동안 뭘 보여줬는지…깡통이다"

 

김지하의 안철수 비난은 더욱 가관이다. 안 후보를 어린애로 비하하며 많은 세대들이 그를 지지하는 모습에 한동안 그의 행보를 지켜봤지만 열흘 동안 아무것도 보여준 것이 없는 깡통이라는 말로 안 후보에 대한 비난을 가했다. 그가 말한 지켜보는 수준이 열흘이라면 과연 박 후보가 그 기간 동안 무엇을 보여주었는지 되묻고 싶다.

 

그가 스스로 독재자 박정희를 버리고 육영수 여사를 따라 너그러운 여성 정치가 길을 걷기로 작정한 박 후보에게 믿음이 간다는 발언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 수가 없다. 새로운 정치를 주장하며 다양한 정책들을 만들고 국민들 곁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안 후보는 깡통이라 하면서, 독재의 칼날을 드리우며, 종북만 내세우는 박 후보에게 믿음이 간다는 발언 자체가 모순을 짊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에 일조한 이들과 친일사관으로 무장한 뉴라이트 인사들이 대거 포진한 채 아집의 정치만 펼치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봤다는 김지하 시인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황망하기만 하다. 블랙 코미디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지하다는 점에서 오적의 김지하 시인의 변절은 충격이라기보다는 서글픔이 앞서게 된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들을 오적이라 부르며 신랄한 비판을 했던 시인 김지하. 이제 그를 상징하는 '오적'은 이제 영혼은 죽어버린 그저 글씨만 존재하는 무의미한 가치로 전락하는 듯하다. 1991년 노태우 정권에 항거해 분신사태가 벌어지자 그는 조선일보를 통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로 독재에 저항하는 이들을 비난한 과거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그는 한 번도 그런 강렬한 저항을 꿈꿔본 적이 없는 시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김지하 시인이 독재에 저항하던 많은 이들에게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비난을 했듯, 오늘 많은 이들은 '변절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되받아 주고 싶을 뿐이다. 보수를 지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수구를 옹호하는 것은 변화가 아닌, 변절일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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