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2. 11:52

홍대 침묵시위 가만히 있으라 이 지독한 침묵 속에 담긴 메시지

홍대에서 있었던 침묵시위에 내걸린 '가만히 있으라'는 너무 기가막힌 문구였습니다. 세월호 침몰 상황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했던 "그 자리를 지켜주세요. 움직이지 마세요"가 모두 담겨져 있는 이 문구는 그래서 더욱 서럽고 무섭게 다가올 뿐입니다. 이 안내방송은 세월호에서 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거대한 권력집단에 의해 울려퍼지고 있다는 점에서 홍대 침묵시위는 대단한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가만히 있으라, 이 지독한 현실은 억압된 강요만 존재한다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의 침몰과 동급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서워지는 진실 속에서 차라리 모든 것이 거짓말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느끼는 감정일 것입니다. 상상 속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끔찍한 일이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벌어졌고, 그렇게 벌어진 참혹한 현실 속에서 그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든 가장 잔인한 결과였습니다.

 

진도 바다에 묻혀버린 이 끔찍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는 자들의 끔찍하고 잔인한 행동들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실종자들을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이권을 따지고, 돈만 바라보는 한심한 작태를 보일 뿐이었습니다.

 

선장을 시작으로 한 승무원들은 승객을 구조하기 보다는 선사와 연락을 해서 초과한 무게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누군가는 이름을 바꾸고, 누군가는 선원복을 갈아입기에 급급하다 속옷 바람으로 도주하는 선장의 모습은 국민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과연 이게 현실에서 가능한 일인지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인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점이 더욱 끔찍하게 다가옵니다.

 

해경은 국내 최고라는 해군의 특수부대의 투입을 막고 오직 언딘만을 현장에 투입하도록 강제했다는 기사는 경악스럽습니다. 모두가 협력해 최선을 다해 세월호에 갇힌 채 침몰한 실종자들을 찾는데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들은 추악한 행동으로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이 잔인한 현실은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런 숨겨진 사실은 국민들을 분노로 이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 지독한 정부는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겨우 사과랍시고 국무회의에서 형식적인 사과로 모든 것을 대신한 이 한심스러움 속에 국민들이 느끼는 분노는 당연히 극대화될 수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인명구조도 하지 못하는 이 무기력한 정부에서 더욱 잔인한 한심스럽고 처참한 이 미친 권력들은 무엇이 중요한지도 아직 모르는 듯합니다. 오직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도망칠 방법만 모색하는 이들을 보면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힘겹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실종자, 희생자 가족들은 진도로 내려가 피켓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대단한 그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수학여행을 간다고 새 옷을 사고, 행복하고 들뜬 마음에 즐거워하던 자식들, 새벽까지 공부를 하고 제주로 가는 배 안에서 잠자겠다던 그 착한 아이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 하나뿐이었습니다. 사고 첫날부터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아이들이 그저 무사하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현실은 그 차가운 바다에 갇힌 채 단 한 명의 생존자도 구조하지 못한 채 보름을 넘겨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힘을 합해 아이들을 구하는데 총력을 다했다면 아마 상황은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속인 채 국민들을 우롱한 이 한심한 정부로 인해 구할 수 있는 목숨들이 그렇게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현실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잔인한 범죄일 뿐이었습니다.

 

생업까지 팽개치고 자식의 무사귀환만 바라던 부모들은 그렇게 지쳐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힘을 내 다시 일어섰습니다. 이 지독한 현실은 결국 무능력하고 부도덕한 권력이 만든 잔인한 살인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 가장 정확하게 사실을 목격해왔던 유가족들의 분노는 그래서 더욱 마음에 와 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살리겠다고 팽목항으로 왔던 수많은 민간잠수사들은 해경과 언딘으로 인해 물속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이권이 아니라 최악의 국가재난에 작은 힘이라도 주기 위해 찾아갔던 많은 민간잠수사들은 마음의 상처만 않은 채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접근조차 할 수 없도록 통제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외침은 그저 비난으로 돌아오는 상황에서 힘겨워하는 유가족들을 뒤로 하고 돌아서야만 했던 민간 잠수사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그들이 아니라면 헤아릴 수조차도 없었을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모두 망가진 채 일어날 힘도 없는 부모들이 팽목항에서 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처참하기만 합니다. 이제는 생존에 대한 희망보다도 아이들 시신이라도 빨리 찾기를 원하는 부모들이 가슴에 아이들을 묻으며 분노를 표출하는 현장은 그래서 더욱 아프기만 합니다. 아이들을 먼저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픈 부모들에게 정부는 여전히 대못만 박고 있을 뿐입니다.

 

30일 서울 홍대 앞에서도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상하의 검은 옷에 마스크를 쓰고 침묵하며 거리를 걷는 장면이 목격됐습니다. 하얀 국화와 함께 이들은 흰 바탕에 검은 색 글씨로 "가만히 있으라"라고 쓴 종이 팻말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거리에 나서 침묵의 행진을 한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어른들이 외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너무 착하게 잘 들어서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야 했던 현실에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 말씀 잘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은 이들은 살아남고 어른들의 말을 잘 들었던 이들만 참혹한 죽음으로 내몰린 현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입니다.

 

청년실업이 극대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청년들을 위한 배려와 이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빚쟁이로 전락해 살아가야 하는 이 한심한 청춘들에게 어른들은 마치 '세월호'에서 들린 안내방송처럼 '가만히 있어라'라고 외칠 뿐이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스팩을 더 높여라. 청춘이니까 아프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까지 내놓는 어른 세대들은 오직 자신들만 고생했다고 항변할 뿐이었습니다.

 

"정말 우리들은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요. 세월호를 기억하고 가만히 있기엔 꺼림칙한 사람들 4월 30일에 모여요"

 

터키어로 '서 있는 사람' 또는 '정지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두란 아담' 시위는 그렇게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시작되었습니다. 노란 리본을 묶은 국화에 검정으로 통일된 드레스코드는 현재를 가장 강렬하게 보여주는 전부였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하고 슬펐던 이들의 분노 속에는 현재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세대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분노가 모두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요? 라는 질문은 아프게 다가옵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 거대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이 가만히 있기를 강요하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기'를 거부한 국민들은 더는 참지 않을 것입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 그 침묵의 현장 속에서 우리의 울분이 그리고 이 지독한 공포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함께 공존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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