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31. 11:01

구의역 19살 하청노동자의 죽음에 분노가 이어지는 이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고치던 19살 하청노동자는 홀로 일을 하다 지하철에 치어 숨졌다. 2인1조가 원칙이지만 원가절감을 위해 그들은 그렇게 안전사고에 방치된 채 안전을 위한 공사를 하고 있었다. 19살 어린 노동자의 죽음은 단순히 그의 죽음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시대 노동자들의 현재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참혹하게 다가온다.

 

구의역 19살 노동자의 죽음, 망가진 노동 현장 속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스크린도어를 보수하던 어린 노동자는 자신을 보호하지는 못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아이러니는 결국 죽음으로 이어졌다. 원칙대로 2인1조로 일을 했다면 결코 죽음까지 이르는 참사가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 일하던 노동자가 정작 안전에는 무방비상태였다는 사실은 섬뜩하게 다가온다.

 

크린 도어를 수리하기 위해서는 2인1조로 움직여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2013년 성수역 사고 이후 이는 꼭 지켜야만 하는 원칙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이 원칙은 기본적으로 지켜질 수 없었다. 최저가 입찰을 통해 계약을 하는 관행 속에서 인건비를 절감해야만 하는 업체가 이 원칙을 지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49개 지하철 역사 스크린 도어 전체를 용역직원 6명이 담당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원칙은 불가능했다. 19살 어린 노동자는 고교 졸업과 함께 공기업 자회사 정규직을 꿈꾸며 일선에 나섰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열심히 일만 하면 꿈이 이뤄질 것이라는 생각은 그 어린 노동자에게는 가장 큰 희망이었다.

 

제대로 밥 먹을 시간조차 없어 가방 안에 넣어 다녔던 컵라면 하나와 수저와 나무젓가락. 누가 그 어린 노동자에게 이런 지독한 환경을 만들었나? 오직 '효율'만 외치던 현실 속에서 모든 노동자는 그 효율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모든 노동자는 가진 자들의 효율의 법칙에 의해 죽음의 벼랑 끝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19살 노동자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었다. 여섯 명의 하청 노동자 중 누가 죽을지 모르는 룰렛 게임과 같은 상황에서 가장 경험이 적었던 이 어린 노동자는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 기관사와 역사 관리인이 수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면 사고는 일어날 수 없었다.

 

이번 사고는 이런 기본적인 원칙조차 지키지 못한 것이 어린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이유가 되었다. 오직 효율만 외친 서울 메트로는 그렇게 수많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첫 사고도 아닌 매년 유사한 사건이 재발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똑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며 해결하지 않는 그들에게 노동자의 죽음은 자신들이 외치는 '효율'과는 맞바꿀 수 없는 가치일 뿐이었다.

 

최저가 입찰을 통해 경비를 절감하고 이렇게 일감을 따내 하청업체는 인건비 절감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 상황에서 2인1조로 일을 하라는 원칙은 무의미한 가치일 뿐이다.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 필요하다. 하지만 최저가 입찰은 그 모든 원칙을 파괴하도록 독려하는 이유가 된다.

 

서울메트로가 정한 최저가 입찰은 결국 모든 사고의 원인이 되었다. 비정규직의 사회가 된 대한민국은 그래서 위험하다. 정규직을 최소화시키고 비정규직을 극대화시키며 비용절감에만 집착하는 노동 환경과 정책은 결국 모든 것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재벌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모는 이 노동 정책이 바로 잡히지 않는 한 19살 어린 노동자의 죽음과 같은 처참한 장면들은 우리의 일상이 될 수밖에 없다. 안정적인 일자리가 없는 사회는 뇌관 없는 폭탄을 품고 살아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미래가 없는 삶은 폭주로 이어지도록 요구한다. 사회적 불만은 폭발을 내재한다. 그렇게 어디에 터트릴 수 없는 폭주는 결국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명박근혜 정부는 이런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켰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범죄를 일상으로 만들었다.

 

재벌 몰아주기를 통해 '낙수효과'가 곧 경제정책의 모든 것인 이들 정부는 노동자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불안한 오늘을 살아내야만 하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내일로 마음만 조려야 했다. 그렇게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노동자들의 삶은 최악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되었다.

 

강남역 화장실 여성 살인사건의 경우도 그저 정신 병력이 있는 가해자의 '묻지마 살인'으로 단순화시켜서는 안 된다. 이건 명백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만들어낸 살인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는 문화가 일상처럼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비뚤어진 살인자는 자연스럽게 약자를 선택했으니 말이다.

 

가방에 남겨진 먹지 못했던 컵라면. 그 어린 소년이 꿈꿀 수 있는 현실은 바로 그 먹지도 못한 채 남겨진 컵라면이 전부였다. 수많은 이들이 추모에 나서고 그 어린 노동자의 죽음에 분노하는 이유는 그 죽음이 그에게만 국한된 불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강렬하게 경고음을 내고 있다. 하지만 그 경고음을 무시하는 사회는 결국 공멸로 향하는 폭주 기관차처럼 움직이고 있다. 

 

19살 어린 노동자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노동 환경이 노동자를 위한 정책으로 바뀌어야만 한다는 사실만 명확하게 하고 있다. 효율만 앞세워 재벌들의 배만 불리는 정책은 결국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한 특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함께 사는 사회가 아닌 착취의 사회 속에서 어린 노동자는 그렇게 희생양이 되어 꿈마저 짓밟혀야만 했다. 더 늦기 전에 이제는 바뀌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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